‘바위’란 뜻. 시돈 난방 약 40㎞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 도시 국가. 이스라엘의 아셀 지파 북쪽 접경 지대에 위치했다(수 19:29).
두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미 견고한 도시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수 19:29), B.C. 10세기경에 두로 왕 히람은 항구에서 지중해 쪽으로 738m 떨어진 곳에 4㎢ 암반을 요새화하여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우호 조약을 맺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백향목을 비롯한 건축 자재와 목공, 석공 등 기숙자를 지원하였다(왕상 5:1-2). 그후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 디글랏 빌레셀 3세, 살만에셀 5세, 에살핫돈  왕의 공격을 수없이 받고 항복하여  조공을 바치다 B.C. 572년경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13년에 걸친 공격으로 국운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후 헬라의 알렉산더에게  멸망당했다(B.C. 333년경). 이때 알렉산더는 길이 800m, 폭 60m의 방파제를 쌓아 7개월 동안 공격한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지 두로를 함락시켰고, 2천여 명 지도자의 목을 자르고, 주민 3만 명을 노예로 삼았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께서 이곳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셨으며(막 7:24, 31), 바울의 선교여행 중간 기착지가 되기도 하였다(행 21:3-7). 오늘날 ‘수르’로 불리는 인구 10,000여 명의 소도시다.

문화
두로를 대표하는 산물은 자주색 옷감이다. 당시 염색 산업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자주색 옷감은 애굽, 구브로, 로도, 시실리, 북아프리카 등지로 수출되었다. 이외에도 목재, 밀, 기름, 포도주, 금속, 말 등은 두로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심지어 두로는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노예들을 데려와 다른 나라에 내다 팔기도 했다. 또 헬라 북쪽 트라케(Thrace) 금광은 두로의 국부를 한층 높여 주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두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존귀한 자’(사 23:8)로 불렸고, 스가랴 선지자는 두로 사람들이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다’고 했다(슥 9:3). 겔 27장에는 번성기 때의 두로가 무역하던 대상국의 나라 이름과 상품들이 상세히 언급된다.

출처 라이프성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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